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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비 살린 팥잎국여행/먹을거리 2010. 1. 27. 20:37반응형
소란스럽다. 달그락 달그락. 5평도 안 되는 작은 부엌에 아낙네들이 5명이나 모여 있다. 쪼그리고 앉은 폼이 천상 요가하는 인도인이다. 한복을 곱게 여며 입은 아낙도 있다. 대장이다. “고기 한동가리 가죠 온나”, “김은 어찔까”, “계름하겨 달라고.” 부엌 바닥에는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주인님을 위해 차린 듯한 산해진미들이 쫙~ 깔려 있다. 부엌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까치발로 총총걸음이다. 스르륵, 부엌문이 열리자 굵고 정겨운 소리가 들린다. “숙아, 다 됐나?” ‘안동 장씨 경당 종택’ 종손 장성진(72)씨가 아내 권순(71)씨에게 하는 말이다. ‘숙’은 딸의 이름이다.
새해 1월1일, 경당 종택은 시끄럽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지들이 종손에게 새해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인사도 인사지만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장씨의 재종숙인 장기철(70)씨는 “종부 음식은 감미롭지. 첫날 그 맛난 것으로 시작하면 최고로 기분좋지”라고 말한다.
종부가 만든 호박전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달걀노른자만 입힌 것은 노란색 호박전, 흰자위만 입힌 것은 흰색 호박전이 된다. “돈전 예쁘지?” 돈전? 납작하게 자른 호박 모양이 동전을 닮아서 ‘돈전’이라고 부른다. 우엉조림은 샤프펜슬 심만큼 가늘게 잘려 차분하게 접시에 앉아 있다. 육회는 두 가지 색이 어우러져 눈을 확 잡아끈다. 짙은 녹색의 미나리와 빨간 육고기. “우리 집안은 육회에 꼭 미나리를 넣지.” 장성진씨의 누이 후진(74)씨가 정겨운 미소로 일러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미나리향이 혼례를 치르는 누이의 입술처럼 붉은 고기조각에 배여 있다. 후각이 입안의 세포를 깨우고 미각이 급하게 흥분한다. 맑고 넉넉한 명태찌개는 소금기 없는 담백한 바다 같다. 북어를 두들겨 만든 고운 가루를 참기름으로 버무린 ‘보푸라기’도 맛나다.권씨는 바쁘게 ‘팥잎국’을 끓인다. 팥잎국은 종손 장씨가 가장 좋아하는 국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친근한 식재료다. 팥의 잎이다. 보기에는 맑은 시래기국 같지만 맛은 완전 딴판이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비할 데 없다. 장성진씨는 12년 전 갑상선암에 걸렸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넉달 만에 생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종부의 지극정성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종부는 그가 좋아하는 팥잎국을 정성스럽게 식탁에 올렸다고 한다. “종손이 좋아해서 자주 해주었지요. 지금까지도 자주 해먹어요. 다른 집에선 이제 안 먹는 음식이지요.”라고 말한다.
팥잎국은 말린 팥잎을 살짝 삶아 콩가루에 묻힌 후 다시마와 멸치로 우린 물에 넣고 끊인 국이다.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 연구원 심기현씨는 “일반적으로 말린 채소는 성분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식이섬유도 풍부하다”고 말한다. 콩가루의 영양은 말할 것도 없다.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경당 종택은 경당 장흥효(1564~1634. 조선 중기 학자) 선생의 종가다. 장흥효 선생은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이다. 장계향 선생의 친정이 되는 셈이다. 장흥효 선생은 벼슬길을 멀리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후학 양성에 전념한 학자이다. 안동 장씨의 시조는 태사 충헌공 장정필 선생이다. 장정필 선생은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서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넘어왔고, 고려 태조 13년에 김선평, 권행 등과 군사를 일으켜 견훤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그 공을 높이 사 ‘태사’라는 벼슬을 주고 안동을 ‘식읍’(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토지와 가호)으로 하사했다. 종손 장성진씨는 장정필 선생의 37대손이자 장흥효 선생의 11대손이다.
종부 권순 선생은 25살에 26살이었던 종손과 결혼을 했다. 조용하고 단아한 종부는 마음에 작은 한이 있다. 혼례를 치르던 날, 25살 처녀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가 신랑이었다. 이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는 날이다. 평생 단 한번이다. 하지만 권순 선생은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지 못했다. 흰옷을 입고 절을 올리고 혼례를 치렀다. 종손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신랑은 군대 가버렸지. 시어머니 빈소가 집안에 있어서 3년간 조석을 올리고 곡소리도 했지. 3년간 흰옷만 입었다니까.” 종손은 “나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며 지긋한 시선으로 종부를 바라본다.겨울난 밤늦은 귀가 때면 문지방에 물 살짝 부어 얼게
종손 장성진 선생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대구시청 공무원시험을 치르고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종가를 지켜야 한다는 부친의 뜻 때문에 사회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부친은 종손에게 알리지도 않고 덜컹 대구시청에 사표를 냈다.
종손은 31살이 되는 해에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종손의 방황이 시작했다. 완고한 아버지와 젊은 열기가 충만했던 아들은 반목했다. 그 사이에서 종부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누이 세 명과 살았다. 마음씀씀이가 착하다고 소문난 ‘선한’ 종부는 남편이 겨울날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문지방에 살짝 물을 부어 얼게 하고, 대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삐걱’ 소리라도 나는 날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들에게 시아버지는 불호령을 내렸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서 마음 졸이던 그에게 빛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40여년 전 아버님이 정남향으로 있는 집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선조의) 묘 자리를 옮겼지. 그때부터 부자관계가 좋아지더라고.” 조금씩 마음을 잡은 종손은 농사도 짓고 종가를 알리고 지키는 일을 했다. 덜컥 갑상선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강한 의지와 종부의 정성으로 이겨냈다. “나무와 꽃을 심고 담배, 술은 전혀 안 하고 뒷산 조깅을 했지. 마음을 비우고 살았어.”종손은 지금도 약을 계속 먹고 있지만 병은 거의 완치되었다고 말한다. “모두 아내 덕이죠.”
동동주는 술같지 않은 술…한과는 미술품
종부의 음식솜씨는 유명하다. 친정이 종가였기에 어릴 때부터 ‘배운 가락’이 있는데다 시집와선 시누이들에게 장씨 종가의 맛을 배웠다. 안동문화해설사 김호태씨는 “장씨 집안 음식솜씨는 안동에서도 유명합니다. 종부의 안동국시는 서울에서도 맛보려고 내려올 정도죠. 마치 장계향 선생이 돌아온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종부가 해주는 안동국시는 국수 가락을 신문지에 올려놓으면 훤히 글자가 비칠 정도로 얇다.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으면 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5살 아이가 누울 수 있는 정도로 큰 도마에 긴 방망이로 양팔을 벌려 반죽덩어리를 미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새해를 맞아 이 댁을 찾은 손님들은 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종부가 마지막으로 내오는 동동주와 한과, 묵나물로 넉넉하게 배를 채운다. 종부가 집에서 담근 동동주는 술 같지 않다. 벌컥벌컥 들이켜도 그저 단 음료수를 마시는 듯하고 한과는 그 모양이 칸딘스키의 미술품처럼 세련되고 그윽하다. 묵나물은 또 어떤가! 안동국시처럼 부드럽다. 따끈한 종가의 온돌방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맛과 합쳐져 ‘마음의 평화’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손님들은 길을 나서면서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2010년 한해 무병장수할 거라고 믿는다.종손은 지금 ‘고택 체험’를 운영하고 있다. 전화로 신청하면 이 댁에서 자고 종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최근에 종부는 몸이 좋지 않다. 종손의 누이들도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종부를 도와 음식을 만든다. (경당종택 054-852-2717, 음식은 정확한 양을 미리 주문해야 한다)
종부 권순선생이 알려주는 팥잎국
1.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팥잎을 따서 음지에 말린 뒤 양파자루에 담아 보관한다.
2. 말린 팥잎을 새벽 마당에 내놔서 이슬이 살짝 떨어지게 한다. (혹은 물을 촉촉하게 묻힌다)
3. 팥잎을 삶는다. 물에 3번 정도 헹군다. 꼭 짜서 칼로 다지고 콩가루를 묻힌다.
4. 육수(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물)를 낸다. 육수에 넣고 끓인다.
5. 물이 너무 많으면 콩가루가 벗겨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 양을 적게 한다. (팥 : 물 = 2 : 3)
6. 끓으면 물을 더 넣는다. 간장으로 간을 한다.반응형'여행 > 먹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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